한강 노벨문학상 소식에, 다들 환호하고 기뻐하셨죠?
저 역시 그랬는데요, 정말 한강의 기적이네요.
저는 한강의 책을 작년에 처음 접했어요
먼저 시집으로 알게 됐거든요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에 있는 서시/한강, 이 시에 반했었죠.
서시 / 한강
어느 날 운명이 찾아와
나에게 말을 붙이고
내가 네 운명이란다, 그동안
내가 마음에 들었니, 라고 묻는다면
나는 조용히 그를 끌어안고
오래 있을 거야.
눈물을 흘리게 될지, 마음이
한없이 고요해져 이제는
아무것도 더 필요하지 않다고 느끼게 될지는
잘 모르겠어.
당신, 가끔 당신을 느낀 적이 있었어,
라고 말하게 될까.
당신을 느끼지 못할 때에도
당신과 언제나 함께였다는 것을 알겠어,
라고.
아니, 말은 필요하지 않을 거야.
당신은
내가 말하지 않아도
모두 알고 있을 테니까.
내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후회했는지
무엇을 돌이키려 헛되이 애쓰고
끝없이 집착했는지
매달리며
눈먼 걸인처럼 어루만지며
때로는
당신을 등지려고도 했는지
그러니까
당신이 어느 날 찾아와
마침내 얼굴을 보여줄 때
그 윤곽의 사이 사이,
움푹 파인 눈두덩과 콧날의 능선을 따라
어리고
지워진 그늘과 빛을
오래 바라볼 거야.
떨리는 두 손을 얹을 거야.
거기,
당신의 뺨에,
얼룩진.
_한강,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문학 평론가 조연정의 평론을 우선 볼까요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는 1993년에 시인으로 등단한 한강이 거의 20년 만에 묶는 첫 시집이다. (중략) 한강은 시인이 된 이후부터 줄곧 언어와 한몸이 되어 언어의 타락을 앓고 있다. 그리고 언어의 순수성을 회복하는 고통의 시간과 더불어 자신의 영혼이 구원되기를 바라고 있다. 이제껏 한강의 소설이 보여주었던 상처받은 영혼들은 침묵에서 진실된 말을 건져 올리려는 시를 쓰는 한강 그 자신이었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이 시집을 읽으며 하게 되었다. 육체의 고통 속에서도 마치 태양을 쏘아보듯 형형한 눈빛을 드러내보이던 인물들도, 꿈속의 이미지에 몰입하던 인물들도, 그리고 침묵의 그림과 마추한 채 천천히 붓질을 하던 인물들도 모두 시인 한강의 페르소나였을 것이다.”
처음 시집을 접하고 이후에 읽게 된 첫 소설은 <흰>이었어요.
“어느 추워진 아침 입술에서 처음으로 흰 입김이 새어나오고, 그것은 우리가 살아 있다는 증거. 우리 몸이 따뜻하다는 증거. 차가운 공기가 캄캄한 허파 속으로 밀려들어와, 체온으로 덥혀져 하얀 날숨이 된다. 우리 생명이 희끗하고 분명한 형상으로 허공에 퍼져나가는 기적.”
—입김, <흰>, 한강소설
하얗고 예쁜 건 일단 사고 보자(?) 싶어 샀던 책입니다.
소설로 분류했지만 시 같았던, 모든 흰 것에 대한 이야기.
강보, 배내옷, 소금, 눈, 얼음, 달, 쌀, 파도, 백목련, 흰 새, 하얗게 웃다, 백지, 흰 개, 백발, 수의..
겨울에 읽는 것이 왠지 잘 어울렸던 소설이었죠.
“산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라고, 그 웃음의 끝에 그녀는 생각한다. 어떤 일이 지나간 뒤에라도, 그토록 끔찍한 일들을 겪은 뒤에도 사람은 먹고 마시고, 용변을 보고, 몸을 씻고 살아간다. 때로는 소리내어 웃기까지 한다. 아마 그도 지금 그렇게 살아가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 때, 잊혀졌던 연민이 마치 졸음처럼 쓸쓸히 불러일으켜지기도 한다.”
—<채식주의자>, 한강
정말 놀랍고도 충격적인 작품이었어요.
책은 세 개의 중편으로 이루어진 연작 장편 소설인데요,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그리고 나무 불꽃,
각각의 중편은 2004년에서 2005년에 걸쳐 각각 다른 문학지에 실렸어요.
채식주의자는 1인칭 관점으로 주인공 영혜의 남편 시점,
몽고반점은 주인공 형부의 1인칭 시점,
나무 불꽃은 주인공 언니의 3인칭 시점입니다.
시점이 바뀌고, 세월이 흘러가면서 스토리가 이어지는데
전혀 어색함이 없고 흡입력이 대단해서
여행 짬짬이 읽는데도 후다닥 읽힌 책이었어요.
한강 작가는 정말 대단하다고밖에 후기를 못남기겠더라구요..
“각진 각목이 어깻죽지와 등허리 사이로 비집고 들어와, 자신의 곧은 물성대로 활짝 펴지며 내 몸을 비틀 때, 제발, 그만, 잘못했습니다, 헐떡이는 일초와 일초 사이, 손톱과 발톱 속으로 그들이 송곳을 꽂아넣을 때, 숨, 들이쉬고, 뱉고, 제발, 그만, 잘못했습니다, 신음, 일초와 일초 사이, 다시 비명, 몸이 사라져주기를, 지금 제발, 지금 내 몸이 지워지기를,”
<소년이 온다>, 한강
신형철 평론가가 이야기했듯, “어떤 소재는 그것을 택하는 일 자체가 작가 자신의 표현 역량을 시험대에 올리는 일”이며, “한강이 쓴 광주 이야기라면 읽는 쪽에서도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겠다고 각오한 사람조차 휘청거리게 만든다.”에 고개를 끄덕이게 돼요. 인간의 잔혹함이 어디까지인지, 읽는 내내 힘들었고 잔상이 오래 남는 소설이었거든요. 에필로그에 작가의 자전적인 내용이 나와요. 저는 이때에야 <아제아제 바라아제> 한승원 작가의 딸이었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혼자서 내적 친밀감을 조금씩 더 쌓았더랬죠.
저는 <소년이 온다>를 읽고 한동안 먹먹해서 한강 작가의 책을 쉬이 다시 들지 못했어요. 책장에 꽂힌 책을, 그저 구경하기만 했는데, 4월 3일이 되니 이제는 읽어야 하지 않나 싶어 용기내 책을 들었습니다. <작별하지 않는다>, 23년 메디치 외국문학상을 받았어요. 올해 4월에 읽은 책이네요.
"성근 눈이 내리고 있었다. 내가 서 있는 벌판의 한쪽 끝은 야트막한 산으로 이어져 있었는데, 등성이에서부터 이편 아래쪽까지 수천 그루의 검은 통나무들이 심겨 있었다." 소설의 첫문단이에요. 머릿 속에 그 이미지가 그려지도록 하는 소설가의 능력에 언제나 감탄하곤 하죠. 흰 눈, 손가락의 절단, 피, 검은 통나무의 이미지들. 탁월한 묘사력.
상황을 사진같이 떠올릴 수 있도록 묘사하는 힘, 이런 건 훈련도 훈련이지만 어느 정도 타고나는 것이 아닐까 싶어요. 타고난 능력에 더불어 사력을 다하면 대단한 게 나오는 법이죠. 신형철 평론가는 말했어요. "누구나 노력이라는 것을 하고 작가들도 물론 그렇다. 그러나 한강은 매번 사력을 다하고 있다."
사력을 다해, 소설을 쓰고, 그 길에 노벨 문학상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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